월요일, 7월 24, 2006

최선을 다하는 자세...

포정해우(庖丁解牛) 라는 고사가 있다.

이것은 장자(莊子) 양생주편(養生主篇)에 나오는 고사로서 .
포정이라는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는데.
그가 소에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려 칼을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음률에 맞았다.
문혜군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어찌하면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포정이 말하기를
"제가 반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손끝의 재주 따위보다야 우월합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그러면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칼질을 실수하여 살이나 뼈를 다친 적이 없습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보통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그 일의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하여 경계하며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살이 뼈에서 털썩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채 일어나서 둘레를 살펴보며 머뭇거리다가 흐뭇해져 칼을 씻어 챙겨 넣습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를 터득했다며 감탄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지금은 경박단소의 시대이다
또 재주가 많으면서도 그에 따르는 원리가 없는 재승박덕(才勝薄德)이 득세하고,
통찰보다는 세기가 (細技)가 주도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면 일 뿐이다.
한 인간이 가능성을 살펴 볼 때 필자처럼 여러가지 잔재주는 많아 보이지만
결국에는 한가지도 잘 매듭을 짓지 못하는 사람과,
우직하지만 한 가지에 끝까지 매달려서
결국 그 이치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공은 당연히 후자의 몫이다,

때로는 전자의 인간형이 쉽게 성공하는 듯하고 먼저 앞서 나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밑천이 드러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 타고난 재주를 앞세워 교만하게 되지만,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결국 자신의 본류에서 깊이를 갖지 못한 사람이 도달 할 길은
언제나 처음 출발점에서 몇 미터 일 뿐이다.

마라톤에서 누구나 제일 앞 줄에 설 수 있다.
또 누구던 처음 1 킬로는 쉽게 일등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2 킬로 10 킬로가 지나면서 점점 한계가 드러나게 되 듯,
일에 미쳐 코피가 터지고, 공부에 미쳐 눈에서 핏물이 떨어질 정도로
자신을 담금질 해보지 못한 사람이 성공을 꿈꾸는 것은
100 미터도 달릴 수 없는 사람이 마라톤 대열에서 제일 먼저 전력질주를 하는 것과 같다,

성공을 꿈꾸려면 목숨을 걸어라,

그리고 백척간두에 서서 마지막 한발을 내 디디는 심정으로 피를 토하고 뼈를 깎아라,

그래서 당신이 쥔 칼날이 두께없는 두께가 되어 틈새없는 틈새를 공략하는 포정의 경지에 이르러라,
그러고서도 실패했다면 그제서야 당신은 운을 탓하거나 운명을 원망 할 수 있다..

운명에 대한 원망도 그것을 할 수 있는 경지가 따로 있는 것이다..


*시골의사 : http://blog.naver.com/donodonsu

살아 남기를 원한다면,,,(2): 기다림에 대해서,,

'삼국지 연의'에는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기다림으로 승리를 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조에게 패한 원소의 아들 원희·원상은 요동으로 도망하여 공손강에게로 갔다.
하후돈 등 측근들은 조조에게,
"공손강이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원희·원상이 또 가담하였으니
장차 우리의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공손강이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은 틈을 타서 속히 가서 친다면
요동을 가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제공의 호위를 빌릴 필요도 없을 것 같소.
며칠 후면 공손강이 두 원씨의 머리를 가져올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손강이 과연 사람을 보내어 원희·원상의 머리를 가져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크게 놀라 조조의 귀신같은 혜안에 감복하여 마지 않았다.
이때 조조는 도리어 크게 웃으며,
"과연 봉효(곽가)의 짐작을 못 벗어나는군." 하고 말하며
곽가가 죽기 전에 조조에게 남겨준 편지를 꺼내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듣건대 원희·원상이 요동에 가서 가담했다 하니 명공께서는 절대 군사를 쓰지 마십시오.
공손강은 일찍부터 원씨들이 요동을 병탄할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이번에 두 원씨가 가서 가담하였으니 반드시 이를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군사로 치신다면 그들은 힘을 합해 항거할 것이나,
늦추어 준다면 공손강과 원씨는 반드시 서로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이렇게 기다려서 승리는 취하는 전략을 가리켜 隔岸觀火 (격안관화)의 전략이라 부른다

이때 이것은 소극적으로 넋을 놓고 강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상대의 정황을 잘 살피면서 주시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즉 기다려서 운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강한 힘을 누르고 억제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이다,

또 병법의 대가 손자는
"강물에 거품이 일 때는 강을 건너지 마라.
강물이 거품이 일 때는 상류에서 강물이 불어 났다는 신호이므로
이때 강을 건너면 화를 입는다" 라고 말한다,

강을 건너려 할 때 거품이 인다는 것은
상류에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났다는 의미 일 수도 있고,
적군이 강을 막아 급류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섯불리 강을 건너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거품을 보는 것은 안목이다.

강물은 평소와 다름없이 흐르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건널 수 있지만,
강을 건너기 전에 그것을 잘 살펴 내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닥칠 화를 제거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 두가지 사례는 기다림으로서 화를 면하는 경우와
기다림으로서 더 큰 이익을 얻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변화"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소심하고 "안주"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변화와 기다림의 사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함을 알고 변화를 하되. 그 변화는 때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무조건 변화를 생각하거나,
다하였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먼저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정돈을 해보자,
가정에서는 변화가 필요치 않은가?
회사에서는 막혀 있지 않은가?
대인관계에서는 궁하지 않은가?
지금 내가 가진 자산의 운용은 그 흐름이 강물처럼 유연한가?

그리고 그중에서 막혔다고 여겨지는 것을 우선순위에 올리고
그것을 소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를 아는 것이어야하고, 소통의 방식 역시 좀 더 쉬운 방향,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닌 독창적이고 힘들면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통하기 위해 쉬운 길만 찾는다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후퇴이며
이러한 후퇴는 곧 스스로를 쇠퇴의 길로 몰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혹은 내 안에서 이런 질서를 유연하게 체득해야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변화하고,
낮과 밤이 교대 하듯이 성한 것은 쇠하고 , 쇠하면 성한다는 이치를 내 안에 받아 들이고,
변화를 거부하거나 그렇다고 애써 변화를 꿈꾸지도 말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변화를 기다리지도 않는 것이다.

변화란 지금도 일어나는 순환이며 생명이다

인체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단지 10년전의 사진을 꺼내 볼 때만 그 변화를 깨달을 뿐,
불과 10분전, 한 시간전과 지금의 내가 다름을 알지 못하는 것 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과 기회들을 보고도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알지 못하다가
어느날 변해버린 세상을 탓하면서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는 내가 살아가는 생명이고 몸짓이고, 공기고 호흡이다,

유연하게 변화하고 궁하기전에 다함을 깨닫고
궁하기전에 변하고 변함으로서 소통하여 쇠퇴함이 없을 것이되,
그 변함을 정해진 때로 여기거나 맹목적인 목표로 삼아
봄에 추수를 준비하고 가을에 파종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때를 모르는 것이므로
변화를 통해 오히려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항상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을 내안에 받아들여 하나가 되도록 하라,,,

그리고 반드시 기억하라 성공하려면 때를 알아야 한다.


*시골의사 : http://blog.naver.com/donodonsu

살아 남기를 원한다면,,,(1): 변화에 대해서,,

# 성공을 위한 준비.


1. 변화를 이해하라,

"주역"의 "계사전"에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 다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지속된다" 라는 말이 등장한다.

원래 주역이란 책은 "변화의 책"이다

하지만 "변화"는 역설적으로 수천년을 이어오면서도 변하지 않는 지고지선의 이치다,

공자가 책을 묶은 가죽끈이 일곱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는 주역의 근본 이치는
어떤 일이 막히면 ( 뜻대로 되지 않거나 그것이 한계에 이르면 )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하게 되며 , 통함으로서 영원하다 라는
궁즉변의 이치를 설명하는 통변론이다 ( 通變論)

주역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달이 차면 이지러지고, 해가 중천에 이르면 기울게 되는데 사물의 이치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것이 다함에도 변하지 않으면 소멸 할 것이요,
막혔다고 여겨지거던 변화하여 그것이 서로 통하게 하면 영원할 것이다."

이렇듯 주역은 철저한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이야기 한다,

지금 당신이 막혔다고 여겨지면 즉시 변화를 모색하되
그 변화는 반드시 중천에 이를 때를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아침도 오지 않은 여명기에 햇살이 더디다고 석양을 준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고 어둠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무모한 일이다

내가 성공을 꿈꾼다면 그것은 철저한 자기 평가가 선행되고
그 결과 지금 내가 막혀 있다고 여겨지면 변화를 준비해야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자리에 머무는 것은 매너리즘이다.

요즘 화두가 된 불루오션 역시 막히면 변하라는 이치와 같다,

지금 당신이 막혀 있다면 무엇을 변해야 할지를 생각하라,

그러나 당신의 변화는 막힘에 대한 부정이지 도피를 위한 변명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당신이 막힌 이유가 나태함이라면 성실을, 자만 이라면 근면을,
부족함이라면 단련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부정이 전제되지 않은 변화는 도피 일 뿐이다.

주변에서 성실히 살았음에도 여의치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사실 그것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 열심히 산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변화란 성실과 근면에 버금가는 중요한 덕목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막혔다고 여겨지거던 변화하라

그점은 재테크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 막히지 않는다면 나아가야하고,
막힌다면 그것의 원인을 자기 중심에서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내 처지가 곤공한 것은 단지 재테크가 여의치 않기 때문인지.
내가 본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기의 본업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재테크에서 성공을 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부분적인 문제라 여겨지거던 그 안에서 다시 변해야한다,
당신이 잘못 선택한 주식투자로 막히거나 당신이 업자의 말을 듣고 잘못 산 부동산에서 막히거나간에
그것이 막혔다면 통하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오로지 변화를 읽고 스스로 변화 하는 것이다.

돈의 흐름도 삶처럼 끊임없이 변한다, 경기도 순환하고 유동성도 변화한다,
이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단지 현재의 흐름만 믿고 안주하면 반드시 그르치게된다.
언제나 그 변화를 주시하고 내가 막히면 (상대가 변하면 )
반드시 먼저 변화해야하고 그럼으로서 통하게 된다.

그것이 통변론이 가르치는 궁극의 이치이다,

살아남으려면 변하라,,

당신이 막힐 수록, 때로는 당신이 잘 나가면 잘 나갈 수록 더 많이 변하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죽을만큼 정진하라,,


'삼국지 연의'에는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기다림으로 승리를 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조조에게 패한 원소의 아들 원희·원상은 요동으로 도망하여 공손강에게로 갔다. 하후돈 등 측근들은 조조에게, "공손강이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원희·원상이 또 가담하였으니 장차 우리의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공손강이 아직 군사를 일으키지 않은 틈을 타서 속히 가서 친다면 요동을 가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제공의 호위를 빌릴 필요도 없을 것 같소. 며칠 후면 공손강이 두 원씨의 머리를 가져올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이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손강이 과연 사람을 보내어 원희·원상의 머리를 가져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크게 놀라 조조의 귀신같은 혜안에 감복하여 마지않았다. 이때 조조는 도리어 크게 웃으며, "과연 봉효(곽가)의 짐작을 못 벗어나는군." 하고 말하며 곽가가 죽기 전에 조조에게 남겨준 편지를 꺼내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듣건대 원희·원상이 요동에 가서 가담했다 하니 명공께서는 절대 군사를 쓰지 마십시오. 공순강은 일찍부터 원씨들이 요동을 병탄할까봐 두려워하였는데 이번에 두 원씨가 가서 가담하였으니 반드시 이를 의심할 것입니다. 만약 군사로 치신다면 그들은 힘을 합해 항거할 것이나, 늦추어 준다면 공손강과 원씨는 반드시 서로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이렇게 기다려서 승리는 취하는 전략을 가리켜 隔岸觀火 (격안관화)의 전략이라 부른다

이때 이것은 소극적으로 넋을 놓고 강건너 불구경이 아니라 상대의 정황을 잘 살피면서 주시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즉 기다려서 운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강한 힘을 누르고 억제함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승리하는 것이다,

또 병법의 대가 손자는 "강물에 거품이 일 때는 강을 건너지 마라 강물이 거품이 일 때는 상류에서 강물이 불어 났다는 신호이므로 이때 강을 건너면 화를 입는다" 라고 말한다,

강을 건너려 할 때 거품이 인다는 것은 상류에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났다는 의미 일 수도 있고, 적군이 강을 막아 급류가 형성되어 있다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에 섯불리 강을 건너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때 거품을 보는 것은 안목이다.

강물은 평소와 다름없이 흐르고, 나는 그것을 충분히 건널 수 있지만, 강을 건너기 전에 그것을 잘 살펴 내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닥칠 화를 제거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 두가지 사례는 기다림으로서 화를 면하는 경우와 기다림으로서 더 큰 이익을 얻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변화"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소심하고 "안주"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변화와 기다림의 사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함을 알고 변화를 하되. 그 변화는 때를 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 무조건 변화를 생각하거나, 다하였음에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먼저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정돈을 해보자, 가정에서는 변화가 필요치 않은가? 회사에서는 막혀 있지 않은가? 대인관계에서는 궁하지 않은가? 지금 내가 가진 자산의 운용은 그 흐름이 강물처럼 유연한가?

그리고 그중에서 막혔다고 여겨지는 것을 우선순위에 올리고 그것을 소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때를 아는 것이어야하고, 소통의 방식 역시 좀 더 쉬운 방향,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닌 독창적이고 힘들면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통하기 위해 쉬운 길만 찾는다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후퇴이며 이러한 후퇴는 곧 스스로를 쇠퇴의 길로 몰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혹은 내 안에서 이런 질서를 유연하게 체득해야 한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변화하고, 낮과 밤이 교대 하듯이 성한 것은 쇠하고 , 쇠하면 성한다는 이치를 내 안에 받아 들이고, 변화를 거부하거나 그렇다고 애써 변화를 꿈꾸지도말고, 변화를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변화를 기다리지도 않는 것이다.

변화란 지금도 일어나는 순환이며 생명이다

인체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단지 10년전의 사진을 꺼내 볼 때만 그 변화를 깨달을 뿐, 불과 10분전, 한 시간전과 지금의 내가 다름을 알지 못하는 것 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과 기회들을 보고도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알지 못하다가 어느날 변해버린 세상을 탓하면서 후회하는 것이 인생이다.

변화는 내가 살아가는 생명이고 몸짓이고, 공기고 호흡이다,

유연하게 변화하고 궁하기전에 다함을 깨닿고 궁하기전에 변하고 변함으로서 소통하여 쇠퇴함이 없을 것이되, 그 변함을 정해진 때로 여기거나 맹목적인 목표로 삼아 봄에 추수를 준비하고 가을에 파종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때를 모르는 것이므로 변화를 통해 오히려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항상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을 내안에 받아들여 하나가 되도록 하라,,,

그리고 반드시 기억하라 성공하려면 때를 알아야 한다.


*시골의사 : http://blog.naver.com/donodonsu